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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비엘비문화살롱} 루이14세를 위한 음악을 만들다 애증으로 죽어갔던 륄리


프랑스의 루이 14 세는 역사상 가장 주목할만한 군주 중 하나로 절대왕정의 상징이자 모범이 됩니다. 72 년의 통치기간동안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중 하나가 되어 세계에 자랑 할 수 있는 이상적인 문화를 꽃 피웁니다.
베르사유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알 수 있듯이, 54 년 동안 그는 여러 왕이 몇 세기 동안 할 말한 일을 하며 프랑스 문화를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문화로 만듭니다. 루이14세가 발레부흥에 힘쓰며 왜 27년간 발레연습을 하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된 제 블로그<춤추는 소피아>로 들어오셔서 확인해주세요!~
blog.naver.com/soosunwhoa5/221958859688

아토마토 왕의 춤, 루이14세가 27년간 발레를 연습한 이유!

​​짐이 곧 국가니라 베르사이유 궁전을 만들고 스스로 '태양왕'이라 칭하며 발레 진흥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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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4세는 스스로를 ' 태양왕'이라 칭하며 유럽궁정의 모델이자 궁중의 아이돌 스타로서 최초로 하이힐을 신은 남자로 기록될만큼 중세와는 다른 세련된 방식으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어 냅니다. 이러한 군주의 위대함과 영광 뒤에는 평생동안 왕을 위해 음악을 만들던 궁중 음악가 륄리가 있습니다. 오늘은 왕에 대한 애증과 망상에 사로 잡혀 죽어갔던 륄리 삶을 조명해보도록 할께요~

륄리는 '프랑스 음악의 왕자'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티통 뒤 티예(Titon du Tillet), 『프랑스의 파르나소스Parnasse François(1732)』 中
음악가들은 시인의 인도에 따라야 하지만 단 한 사람 예외가 있다면 바로 륄리이다. 그는 열정이 무엇인지 알고, 어느 작가보다 더 깊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오기 때문이다.
샤를 드 생 테브르몽 경(Charles de Saint-Évremond)

륄리 사후 1711년 만들어진 판화(오른쪽)surintendant de la musique du roy(왕의 음악감독)이라 쓰여있다.&nbsp;



륄리는 이탈리아 페렌체에서 방앗간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기타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고, 1646년 륄리는 기즈대공의 눈에 띄어 프랑스로 따라가게 됩니다. 거기서 식기실의 일꾼으로 몽팡시에 부인을(루이14세의 사촌누이)을 위해 일하게 되죠. 몽팡시에 부인의 도움으로 음악적 재능이 개화합니다.

오케스트라를 훈련하는 데 지휘봉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장 바스티에 륄리'

오케스트라를 훈련하는 데 지휘봉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보통 이 업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자주 회자되는데 오늘 이야기 할 그의 죽음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1653년 2월 장 드 캉베로프의 궁정발레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에서 어린 루이14세와 같이 춤을 추게 되면서 륄리는 루이14세와 첫만남을 갖게 됩니다. 륄리보다 여섯 살 어렸던 루이14세는 륄리를 점점 좋아하게 되었으며, 야망과 출세욕이 강했던 륄리는 많은 발레곡들을 써서 왕의 환심을 샀고 ,이후 왕에게 신나게 아부를 떤 결과로 1661년 왕실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으로 임명됩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륄리는 자신의 높은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 여러 소년과 여자들과의 애정 행각으로 여러 차례의 추문으로 번지게 됩니다. 이는 루이 14세에게 큰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으며, 륄리는‘남색가’내지 난봉꾼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게 됩니다.
이러한 추문에도 불구하고, 륄리는 항상 루이 14세의 위엄을 세울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데 집중했고, 왕은 륄리를 자신의 음악적 여흥에 필수적인 사람이자 몇 안되는 진정한 친구로 여겼지만 서먹해진 관계는 륄리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되죠.


영화 《왕의 춤》에서 륄리의 죽음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1687년 1월 8일, 륄리와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진 루이14세가 연주회장에 오지 않자, 왕이 오지 않았다는 귀족들의 말을 무시하고 테 데움(Te Deum, LWV 55) 연주를 강행하는 장면이지요. 오지 않을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첫 장면은 테 데움(Te Deum)의 연습을 위하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현 시대의 지휘봉과는 달리 길다랗고 뽀족한 금속 막대기 형태로 바닥을 찍으며 박자를 맞추는 방식 이었죠. 그는 박자를 맞추기 위해 지휘봉으로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자신의 발가락을 찧고 맙니다. 왕에 대한 애증이 분노로 잘 표현된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고로 발가락에 생긴 상처는 곧 곪아들어갔고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위생환경에서 이 상처는 급속히 괴저로 발전되어 썩어들어가기 시작하죠. 의사가 괴저가 생긴 발가락에 대해 절단수술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륄리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무엇보다도 그는 궁정 무용가를 겸하고 있었고, 발가락을 절단하게 되면 춤을 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루이14세에게 이미 미움을 산 것도 모자라 춤까지 출 수 없다면 루이14세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기회와 자신의 위치는 이제 사라지는 것이었기에 썩어가는 발가락을 부여잡고 망상에 젖어 루이14세 부르짖다 죽어간 것입니다.

륄리는 루이14세를 위해 프랑스 서곡을 처음 창안했는데, 이는 바로크 음악에 중요한 혁신을 불러옵니다. 서정비극(Tragedie lyrique)이라는 장르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무대 작품에 서곡을 붙인다는 발상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었습니다.
륄리가 만든 무대음악의 서곡은 장대하며, 도입부에 나타나는 부점 리듬이 특징으로 이 느린 도입부의 음악이 빠른 푸가풍으로 바뀌며, 춤이 시작됩니다. 특히 첫부분의 느린 부점리듬은 듣는이로 하여금 왕의 위엄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영화 《왕의 춤》의 나왔던 <밤의 발레>의 서곡을 들어보시면서 '음악과 춤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자'들을 상상해보시면서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본문 참고>
장 바티스트 륄리_나무위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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